2009/07/06 11:27

중국여행-추천 도서 사마천(司馬遷) 사기(史記)

사기ㅣ사마천ㅣ소준섭 평역|서해문집

 

사마천(司馬遷(?BC 145~?BC 86)이라는 사람이 한나라 무제 시대에 완간한 당시 고대 역사부터 2,000여년간의 중국역사 이야기다. 사기(史記)이전의 역사 기록은 주로 연도별로 서술하는 편년체(編年體)방식 이었으나<대표적인 역사서는 공자의 춘추(春秋)> 사기는 연대에 따라 사건을 기록을 ()·()·()·()등으로 역사를 입체적으로 기록한 최초의 기전체(紀傳體) 방식 역사서 이다.

 

사마천은 한 나라 경제 시기 아버지 태사령(太史令- 역사기록을 담당하는 관직)을 지낸 사마담(司馬談 ?~BC 110)의 아들로 태어난다. 사마천은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려서 부터 역사에 관심을 가졌으며 여행을 다닐 기회가 많았고 10세가 되는 해부터 공자의 11대 자손인 공안국을 스승으로 하여 고문 경서를 배웠다고 한다. 사기는 아버지가 죽으며 자신이 시작한 사기를 완성 할 것을 유지로 남긴 것은 완성한 것이다. 사기를 기록하는 중에 사마천은 친구인 이릉(李陵) 장군이 흉노족과의 전쟁에서 포로로 잡힌 것을 변호하다 황제의 노여움을 사 BC 99 48세 되던 해 궁형(宮刑)을 당한다. 당시 이릉장군은 5천의 병력으로 8만의 적과 맞서 끝까지 분전하다 흉노에게 투항했다. 사마천은 이릉장군이 살아 돌아와 훗날을 도모하기 위해 적에게 투항한 것이라고 변론하였다. 사마천은 한 무제에게 사형 대신에 생식기를 자르는 궁형을 감내하며 옥중에서도 목숨을 부지 하면서 사기를 기록해 갔다고 하고 당시 궁형을 당한 자들은 환관이 되었으며 이후 한 무제의 신임을 회복하여 환관의 최고직인 중서령(中書令)까지 되며 BC.91년경에 사기를 완성한다. 당시 당나라의 형벌은 사형(死刑)·궁형(宮刑)·월형(刖刑:발뒤꿈치를 자르는 형벌)·의형(劓刑:코를 베는 형벌)·경형(黥刑:얼굴·팔뚝 등의 살을 떠내고 홈을 내어 죄명을 찍어넣는 형벌)등이 있었는데 사형을 면하려면 50만냥을 내면 되었으나 사마천의 형편으로는 불가능한 금액이었고 아버지 유지인 사기를 완성하기 위하여 어쩔 수 없이 남자로서 치욕스런 궁형을 사마천은 선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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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 사기는 본기(本紀) 12, 연표(年表) 10, () 8, 세가(世家) 30, 열전(列傳) 70권 모두 130 52 6 5백자에 이르며 당시는 태사공서(太史公書)라고 불리다 위진(魏晋)시대부터 사기라 하였다.

 

중국여행객에게 꼭 권하고 싶은 책중에 하나가 바로 사기 이다. 사기는 단순 중국 역사서로 읽기 보다는 사람 살아 가는 이야기로도 충분하다. 사마천이 사기에 기록한 다양한 역사속 인물들의 행동을 기록하며 후세에 전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면 현대를 살아 가는 사람들에게도 뜻하는 바가 많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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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7/03 11:04

유방(劉邦)의 한(漢) 나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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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황제가 진제국을 건설하던 시대는 중국 역사에서 사상과 지식이 교류가 가장 역동적이고 풍부하게 발달하던 시대였다. 이러한 시대를 하나의 제국으로 통합하고 진나라를 세운 시황제의 제국은 단명을 하게 되는데 이후 등장하는 통일왕조가 바로 한(, BC206 ~AD 220)나라고 한나라의 탄생 까지 중국의 중원은 가장 드라마틱한 역사의 현장으로 변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중국 영웅호걸들에 대한 이야기가 바로 이 시대의 이야기들이다 특히 서초패왕(西楚覇王) 항우(項羽, BC232~BC202) 와 한고조 유방(劉邦 BC247 ?~BC195)과 관련된 이야기는 들어도 들어도 재미가 있는 이야기들이 많이 있다. 한 고조 유방은 일반 서민으로 태어나 한 때는 항우에 의해서 한왕(漢王)으로 봉해질(BC 206) 정도로 미약하였으나 끝내는 중국 역사상 강력한 제국을 건설하여 약 400년을 지속 하였다. 지금 중국을 말하는 한족도 이 때 한나라로부터 유래 한다고 한다.

 

진나라가 강력한 법치를 가지고 백성을 제도로 다스리며 백성들의 억압하여 민심이 진나라를 떠났다는 교훈을 거울삼아 한 고조는 약법삼장(約法三章) “사람을 살해한 자는 사형에 처하고, 사람을 상해하거나 남의 물건을 훔친 자는 죄값을 받는다”는 단순한 제도를 도입하고 과거 진나라가 시행하며 백성을 괴롭히던 복잡한 법제도롤 파기하며 민심을 수습한다. 한 왕조는 또한 사람의 도리를 중시하는 유교를 공식 국교로 승인하여 제국 백성들 교화에 나선다. 강성한 제국은 인구 55백만까지 증가하며 농업, 수공업, 상업등 모든 영역에서 사회가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어 나갔다.

 

한나라는 중간에 야심만만한 정치가 왕망(王莽, BC45~AD23)이 황제를 몰아내고 건설한 신( 824)이라는 나라가 있으며 이를 기준으로 전한과 후한으로 나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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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접해 있는 주변국들 특히 한반도는 역사적으로 중국에 통일제국이 생겨나 통합된 힘을 가지게 되면 한반도에 까지 역향을 미치게 되는데 진나라가 강성한 시대에는 요동까지 제국의 세력이 미쳤으며 한나라가 강성한 시대에는 한나라의 한사군을 한반도에 설치하게 된다. 얼마전 MBC 방송국에서 동명성왕 (東明聖王 BC 37BC 19) 주몽(朱蒙)( BC 58~BC 19)의 야기기를 TV 대하드라마로 방영되어서 큰 인기를 끌었는데 당시 이야기가 바로 한나라의 한사군을 몰아 내며 고구려를 건설해 가는 과정의 역사 이야기다. 역사를 보는 관점은 다양하다 한국인이 중국역사를 보는 관점과 중국인이 한국역사를 보는 관점이 다른 것을 어쩔 수 없는 현상이다. TV 드라마는 이러한 사회적인 분위기를 잘 편승하여 역사적 사실 보다는 시청률을 반영하여 드라마를 만들게 된다. 중국 여행을 준비하는 여행자라면 드라마 내용 보다는 역사적인 사실들을 쫏아가는 것이 보다 많은 것들은 얻는 여행이 될것이다.현지인들과 드라마 속의 야기가를 가지고 역사 이야기를 하면 많이 불편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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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한 사진들은 한제국 백성들에게 태평성대 시기중 하나인 문경지치(文景之治)를 이끈 4대 황제인 경제(景帝, BC188-BC141)의 능인 한양릉(漢陽陵) 지하 무덤의 모습들이다. 이 무덤의 주인공 경제의 10번 째 아들로 뒤이어 등극하여 한제국을 가장 부강하게 이끈 한무제 유철(漢武帝劉徹 BC156 ~BC87)가 바로 한반도에 한사군을 설치한다.

 

사진들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이 때 이미 표준화된 군수품 및 생활용품 생산 시설들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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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7/02 14:06

시황제(始皇帝) 진(秦)나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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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 221BC 206) 나라는 중국의 고대 왕조 주()나라 (BC 1046BC 771) 때 제후국의 하나였다 중국 최초로 통일을 완성한 국가로 진시황제 (始皇帝, BC 259~BC 210)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시황제의 성은 영(). 이름 정()으로 여불위(呂不韋, ?~BC 235) 도움으로 진나라의 왕이 된다. 진시황제의 아버지인 진나라 소왕(昭王)의 둘째 아들인 안국군(安國君) 자초(子楚)가 조()나라의 수도 한단(邯鄲)에 있을 때 그곳을 방문한 여불위를 만나게 된다. 당시 여불위는 대상인으로 제후국 여기저기 다니며 장사를 하여 정세에 밝아 세상의 판세를 읽는데 뛰어난 능력을 가졌다고 한다. 이때 여불위는 자신의 애첩을 자초에서 주었는데 이미 그 애첩은 임신 한 상태였다고 한다. 그후 자초는 진나라의  장양왕(莊襄王)이 되었으며 장양왕의 등극과 더불어 여불위는 승상이 되었고 후에 상국(相國) 이라는 최고의 지위까지 올라 간다. 장양왕이 즉위 3년만에 죽자 여불이가 준 애첩이 낳은 아들 정() 13세에 왕이 된다. 바로 이 사람이 시황제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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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불위는 시황제를 도와 진나라의 기틀을 튼튼히 한다. 그러나 시황제의 모후 조희와 지속적으로 몰래 관계를 맺는다. 모후 조희는 환관 노애(嫪毐)와도 밀통을 하여 두아이까지 두었다. 노애는 모후의 총애를 받으며 여불위와 함께 진나라에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 하다가 결국 반란을 일으키게 된다. BC 238년 반란을 진압한 시황제가 여불위와 노애를 제거후 본젹으로 진나라를 다스리며 최고의 참모인 이사(李斯) 등을 등용하여 강력한 부국강병책을 실시하고 문자 ·도량형 ·화폐의 통일  전국적인 도로망의 건설등을 통하여 제국으로 발전하는 기틀은 닦아 나간다.

 

시황제(始皇帝) 6국을 통일 후 삼황오제(三皇五帝)도 하지 못한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하여 스스로 황제라는 호칭을 처음으로 사용한다. 이사의 건의로 봉건제 대신에 군현제(郡縣制)라는 통일제국 운영의 제도로 받아 드리고 이사는 정위(廷尉)에서 승상(丞相)으로 진급하였으며 강력한 법치를 통치이념으로 강조하며 국가의 사상을 통일한다는 명분으로 지식인들을 탄압한 분서갱유(焚書坑儒)를 단행하는등 억압적인 정책을 실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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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강력한 법치로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진나라는 BC210년 시황제의 갑작스런 붕어후후 이사와 조고(趙高)라는 환관이 조서(詔書)를 조작하여 영리한 맏아들 부소(扶蘇)와 장군 몽염(蒙恬)를 자결하게 하고 아둔한 막내아들 호해(胡奚)에 황제로 등극하게 하여 국정을 농단하다 조고는 이사를 참소하여 죽게하고 호해와 함께 대부분의 시황제와 황족 자식들을 죽인다. 모든 권력을 쥔 조고는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호해마저 암살하고 부소의 아들 자영(子嬰)을 다시 황제에 옹립 후 46일 만에 처들어온 한나라 유방(劉邦)에게 항복하고 진나라는 3 15년 만에 멸망하고 만다.

 

진나라의 통일제국은 비록 짧은 기간 존재하였지만 진나라가 도입한 군현제 및 통일제국을 다스리기 위하여 도입한 각종 제도들은 그후 지속적으로 발전하여 중국의 기본이 되고 있으며 또한 주변 나라에 전파되어 나라를 운영하는 근본적인 제도로 발전해 왔다.

 

진나라가 단명한 여러가지 이유가 있으나 이사가 시행한 강력한 법치와 백성들의 다양한 사상을 억압하는 정책에도 그 이유가 있을듯하다. 요즘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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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7/01 11:46

중국 여행의 시작! 서안(시안西安) 으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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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천년가까이 서양 역사를 이끌 었던 로마라는 제국은 기원전 7세기에 라틴족들이 이탈리아 반도 중부의 티베르 강(Tiber)유역에 세운 제국으로 395년에 동로마 제국과 서로마로 분할되고 서로마 제국은 476년에 동로마 제국이 1453년 명망할 때 까지 서양의 모든 것을 지배한 제국이었다. 에드워드기번(1737-1794)이라는 영국 사람이 로마를 여행하며 폐허로 변한 로마를 보고서 구상한 역사 이야기를 1776년 처음 출간한 쇠망사 라는  책을 1788년 마지막 세권 까지 출간하여 로마제국쇠망사라는 책으로 완간한후 로마에 대한 서양 사람들의 관심은 크게 증가 하였다.

 

나 또한 잘 알지도 못하는 로마제국에 대한 이야기를 한번 알아 보자고 로마를 여행하기 전에 좀 두껍기는 하지만 간단하게 번역한 이 책을 읽어 보았으나 역시 뭔 내용인지 모를 정도로 이해하기가 힘든 부분이 많았다. 그것은 아마도 로마에 대한 사전 지식이 부족하기 때문에 책을 읽더라도 역사를 모르기 때문 이었을 듯하다. 애초에 학교에서 배운 시험공부 수준의 로마역사 공부로는 불가능한 시도 였다. 이책을 읽고 느낀 점은 딱 하나 책에 나오는 풍부한 역사적인 이야기를 풀어 갈 정도로 당시에 에드워드 기번이라는 사람이 이 책을 쓴 230년전에 참고 할 만한 문서 자료가 이미 영국에는 많이 있었거나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는 것이 부럴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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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서양에 로마라는 거대 도시가 있었다면 동양에는 서안(시안西安) 이라는 도시가 이미 있었다. 서안의 역사도 주나라 무왕 시대(기원전 10세기)에 건설한 도시부터 시작한다. 서안은 그후 동양역사의 중심 중국역사의 중심도시로 천여년을 이어갔다. 서안은 주나라 이후 13개 왕조의 수도로 73명의 황제가 제국을 통치하였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도시이다. 당시 시안의 이름인 장안(長安)은 나라의 수도를 말하는 보통 명사 처럼 쓰였다.

 

로마를 방문해서는 군데 군데 남아 있는 역사적인 건물들속에서 로마의 화려한 문화와 역사를 간접체험 할 수 있지만 서안을 방문하는 여행객들은 고대 서안의 역사속으로 직접 들어가는 체험을 해 볼 수 있다.

 

그 대 표적인 것이 바로 서안성 이다서안성은 우리나라나 서양의 성들 처럼 산을 끼는 것과 다르게 평야지대에 도시계획과 더불어 정교하게 축조한 성이다.

 

서안성은 중국역사에서 가장 강력하고 화려한 시대를 보낸 당나라 때 건설한 기초위에 명나라 때 개축(1374~79 )한 것으로 성벽 길이 25.7㎞이고 두께 12~16m, 성벽 내부의 면적은 35㎢ 성 둘레 길이는 13.74㎞이고 성벽 높이는 12m, 성벽 폭은 꼭대기 쪽 12~14m, 아랫부분은 15~18m이다. 성벽은 동서남북 4개문이 모두 남아 있고 둘레에는 길이 13.7㎞의  해자(垓字)가 설치되어있다. 성곽 바깥쪽은 벽돌, 안쪽은 흙을 다져 쌓았는데, 벽돌로 쌓은 외벽은 석회와 모래, 소금, 찹쌀 등을 섞어서 쌓았다. 근대에 1781년과 1983년에 성곽의 복원공사가 이루어졌으며 해자를 따라 순환공원을 조성하였다.

 

당나라는 여러가지 특징이 있는데 가장 큰 특징은 아마도 봉건제도이후 과거제도에 의한 관료사회의 발달에 의한 사회구조의 변경과 개방성에 있을듯하다. 이러한 개방성으로 수도였던 장안은 전세계 사람들이 몰려들게 되었고 모여드는 사람들은 저마다의 나라에서 다양한 풍물을 가져와서 교역하였으며 돌아 갈 때는 당나라의 다양한 물품들을 구입하여 귀국하였다. 그 유명한 실크로드의 출발지도 이곳 장안 서안성이었다. 따라서 서안성에는 각 구역별로 시장들이 운영되었고 그에 따른 다양한 사회구조도 발달하였다. 당나라 시대 한반도는 최초의 통일국가 당나라의 지원을 받은 신라에 의하여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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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30 11:34

서안의 사랑 이야기 현종 양귀비의 장한가(長恨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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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현종 이융기(唐玄宗 李隆基 685-762) 당 예종 이단의 3남으로, 어머니는 숙명황후 유씨이고 고모할머니가 바로 중국역사상 유일한 여 황제로 유명한 무측천(則天武后, 624~705)이다. 현종은 황제등극 초기 한동안은 중국 역사에서 가장 백성들이 살기 좋은 태평의 시대 개원의치(開元之治)라 불릴 정도로 훌륭한 재상들을 주변에 두고 정치를 잘 하였으나 자신이 가장 아끼고 사랑했던 무혜비(武惠妃 699~737)의 사망과 양귀비와의 만남과 더불어 정치는 몰락의 시대로 접어든다.

 

양귀비(楊貴妃 719~756)는 애초에 현종과 무혜비의 18번째 왕자 수왕 이모의 궁녀로 17세이 궁에 입궐(735)하였다. 비파연주와 외모가 뛰어나고 제주가 있던 양귀비는 현종의 딸인 함의공주의 결혼식에 연주자로 참석 했다가 수왕의 눈에 띄어 정식으로 수왕의 비가 된다. 무혜비의 사망후 실의에 빠져 있던 현종은 평소 눈여겨 보았던 양귀비에 대한 이야기기를 당시 측근 환관 고력사에게 이야기 하게 되고 고력사는 양귀비를 잘 설득하여 수왕을 떠나 화산의 도교 사원으로 들어가 여도사(女道士)로 지내게 한다. 후에 현종은 태진궁 이라는 도교 사원을 만들고 이곳을 관리하는 여도사(女道士)로 양귀비를 불러 들려 본격적인 사랑을 시작한다. 740년 양귀비 22살 현종 57살에 처음 만남을 가진후  745, 이융기의 나이 61세 때에 양옥환(楊玉環)은 현종의 귀비로 정식 책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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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귀비에 푹 빠져 있던 현종은 양귀비 가족들에게 상당한 지위를 주게 되는데 그중에 6촌친척 오빠 양소도 있었다. 개인적으로 별 능력이 없던 양소는 현종의 총애를 받으며 '국충(國忠)'이란 이름을 하사받았다. 당시 현종은 재상 이임보를 견제 하기 위하여 양국충을 키웠으나 이임보 실각후 승상에까지 올라 40가지의 지위를 독점하며 국정을 농단하여 안녹산 (安祿山 703? -757)과 사사명으로 하여금 안사의 난(安史-755763)을 일으키는 빌미를 제공하여 결국은 양귀비를 죽게 만든다. 북방 변방 장수 였던 안록산은 6개국어를 할 정도로 똑똑한 돌권족 출신 장수로 양귀비를 통하여 현종의 총애을 받아 병력의 3분의 1을 관장 할 정도로 막강한 병권을 가질 정도로 지위가 급성장하여 결국 양충국과 충돌하게 되어 황제 옆에서 국정을 독점하던 양충국과 반목을 하게 된다. 안녹산은 입궁을 하였을 때 양귀비와 눈이 맞아 나이 어린 양귀비를 어머니로 부를 정도로 양귀비와 잘 놀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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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을 농단하는 양국충을 처단한다는 기치로 안사의 난이 일어나자 양국충은 현종을 설득하여 백성들 몰래 스촨성 지역으로 피난길에 오르게 되는데 장안(長安) 서쪽 지방인 마외역(馬嵬驛)에 이르렀을 때 양충국과 양귀비등 양씨 가족에 대한 불만이 폭발한 호위 군사가 양국충을 죽이고 현종도 어쩔 수 없이 양귀비를 죽음에 이르게 한다.

 

안사의 난이후 757 12월 장안으로 돌아온 현종은 감로전에 거처하며 쓸쓸한 나날을 보내다 병이든 현종은 7625 3일 새벽 78세에 붕어 하였다.

 

현종의 치세는 선천(先天) 712 ~ 713년 개원(開元) 713 ~ 741년 천보(天寶) 742 ~ 756년로 나뉜다.

 

장한가(長恨歌)는 현종 붕어 50년 후 당대의 유명한 시인 백거이가 806년 나이 35세에 왕질부의 제의로 백거이는 시인의 상상력을 발휘해서 시로 진홍은 산문으로 현종과 양귀비의 비련의 사랑 이야기를 쓴 것이다.

 

노래의 형식은 칠언(七言) 절구로 120행으로 되어 있으로 4 부분으로 나뉜다.

 

1장 현종과 양귀비의 만남과, 양귀비에게 쏟는 현종황제의 지극한 애정 등을 노래하였다.

2장 안사의 난으로 몽진길에 양귀비를 지켜 주지 못한 뉘우침과 양귀비 사후의 외로움등

3장 장안 환도 후 양귀비와 옛 생각을 회상하며 지내는 현종의 모습 

4장 도교 도사의 환술(幻術)로 양귀비의 영혼을 만나 사후세계에서도 사랑을 이어 갈 것을 맹세 하였으나 천상(天上)과 인계(人界)의 단절 때문에 살아 있는 동안은 다시 만날 수 없음을 비통해 하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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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 부분의 내용은

 

天上人間會相見 천상에든 세상에든 다시 보게 되리라네

臨別殷勤重寄詞 헤어질 즈음 간곡히 다시 하는 말이

詞中有誓兩心知 두 마음 만이 아는 맹세의 말 있었으니

七月七日長生殿 칠월 칠일 장생전에

夜半無人私語時 인적 없는 깊은 밤 속삭이던 말

在天願作比翼鳥 하늘을 나는 새가 되면 비익조가 되고

在地願爲連理枝 땅에 나무로 나면 연리지가 되자고

天長地久有時盡 천지 영원하다 해도 다할 때가 있겠지만

此恨綿綿無絶期 이 슬픈 사랑의 한 끊일 때가 없으리

 

세상에는 사랑이야기 많기도 하다. 어떤 사랑이 고귀하고 어떤 사랑이 천한 것인지는 제 삼자의 평가 일 뿐이다. 현종이 며느리인 양귀비에 빠져지내던 10여년 사이 당시 세계 최강의 당나라 백성들은 고통의 나락에 떨어 졌으며 나라는 혼란에 빠져 들게 된다. 그러나 당사자들인 현종과 양귀비는 가장 행복한 시절을 보낸다. 당시 한반도는 신라가 당나라와 함께 고구려(668)를 명망시키고 통일시대로 접어 들던 시대이다.

 

서안여행중 장한가를 보고난후 한가지 느끼는 것이 있다면 사람~ 남녀 사이의 사랑은 그 어떠한 장벽이라도 넘어서 한번쯤은 몸 던저 해 볼만한 가치가 있는 순수한 인간삶의 행위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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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청지에서 화청지의 뒷산까지 무대로 해서 만나는 장한가는 좀 비싸다. 화청지 입장료와는 별도로 자리에 따라 250-988위안까지 더 투자해야 볼 수있다. 운좋게도 가장 비싼 자리 중 에서도 가장 좋은 자리에서 감상할 기회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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